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23세 (문단 편집) ==== [[사제(성직자)|사제]] 시절 ==== 군에서 제대하고 [[1904년]](22세)에 [[로마]]에서 [[사제(성직자)|사제]]로 서품받았다. 그러나 막상 부모와 삼촌 자베리오는 아들/조카의 [[성품성사|서품식]]에 참석하지 못했는데, 로마행 기차표를 살 돈이 없었던 탓이었다. 안젤로는 부모와 삼촌에게 감사의 편지를 따로 보내야 했다. 고향 소토 일 몬테의 성당에서 첫 [[미사]]를 드린 뒤, 로마의 아폴리나레 신학교로 돌아와 사감으로 일하면서 교회법 공부를 계속했다. 한편, 안젤로에게 로마에서 공부하라고 권했던 라디니-테데스키 [[몬시뇰]]은 당시 교황 [[비오 10세]] 때문에 큰 괴로움을 겪었다. 라디니-테데스키는 사회개혁에 큰 열정을 쏟았고, 그렇기 때문에 (당시 [[가톨릭]] 기준으로는 빨갱이스럽단 평가를 받았던) [[레오 13세]] 시절에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. 그러나 후임 교황이 된 비오 10세는 보수적인 인물이라 당시 라디니-테데스키가 진행하던 사회운동을 멈추라고 명하고 베르가모의 [[주교]]로 임명했다. 비오 10세는 라디니-테데스키를 주교로 임명함으로써 일종의 좌천을 시킨 것이다. 이것이 라디니-테데스키에겐 큰 고통이었다. 아무튼 베르가모의 주교로 임명된 뒤 라디니-테데스키는 1905년에 안젤로(23세)를 비서로 삼아 임지로 부임했다. 안젤로의 고향에서 가까운 베르가모는 [[롬바르디아]]의 공업도시로 공장 노동자들이 많고 가난한 곳이었다. 신자들은 새로 부임한 주교가 '로마에서 온 귀족 출신 성직자'이기 때문에 선입견이 있었지만,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는 라디니-테데스키의 태도를 보고 점차 생각을 바꾸었다. 안젤로는 주교의 비서로 일하는 동안 노동자들의 고충을 알게 되어 사회문제에 관심을 쏟았다. 후에 요한 23세가 [[제2차 바티칸 공의회]]를 열게 된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. 하지만 이런 태도 때문에 근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아 [[교황청]]으로부터 찍혀 있었다.[* 훗날 요한 23세가 [[교황]]이 된 뒤에, [[교황청]] 문서들 중 자기 관련 서류를 보았는데, 거기에 '근대주의자 혐의가 있다.'는 문구가 적힌 것을 보고 열이 뻗친 나머지 그 문서에 직접 "나, 요한 23세 교황은 근대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선언한다!"라고 적었다. 이후 분노가 가라앉자 "나는 성무성성으로부터 감시받던 [[사제(성직자)|사제]]도 교황이 될 수 있다는 예다."라고 추가로 적어넣었다.] 한편 라디니-테데스키 주교는 계속해서 [[비오 10세]]와 충돌했다.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태도였던 것과 달리 교리에서는 의외로 보수적이던 라디니-테데스키 주교에게는, 교황과 계속 충돌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정신적 고통이었다. 심지어 교구 안에 자신과 교황 사이를 이간질하는 첩자가 있다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. 라디니-테데스키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쇠약해지다가 1914년에 안젤로(32세)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. 그가 사망한 날짜는 교황 비오 10세가 사망하고 이틀 뒤였다. 라디니-테데스키 주교를 진심으로 존경하던 안젤로에게는 이 죽음이 큰 아픔이었다. 바로 이해에 [[제1차 세계대전]]이 일어났다. 이듬해(1915), [[이탈리아]]는 [[오스트리아-헝가리]]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는 병력을 징집했는데, 안젤로도 33세 나이로 [[재입대|재징집]]되었다. 안젤로는 (첫 징집 때 달았던) 병장 계급을 받고는 밀라노의 의무대에 배치되었다. 후방으로 이송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꾼으로 노릇하면서도 또한 성직자로서 활동했다. 1916년에 이탈리아 정부는 군에 징집된 모든 [[사제(성직자)|사제]]들을 [[군종 신부]]로 임명했다. 이때 안젤로는 군종 신부로서 중위가 되었다. 한편 안젤로의 남동생들도 군에 징집되었고 여동생 1명은 암에 걸려, 안젤로는 공적인 일로도 사적인 일로도 바쁘고 힘들었다. 이 시기에 안젤로는 베르가모 주교의 명으로 학생용 호스텔을 짓고 학생들을 받아들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.[* 여기에 누이 2명을 불러 여사감으로 임명했다.]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19년(37세)에 공식적으로 제대하여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성체대회를 준비하는 일을 하였다. 1921년(39세)에 교황 [[베네딕토 15세]]는 안젤로를 [[몬시뇰]]로 임명하고 전교회(당시에 일어난 가톨릭 선교단체)를 통합하고 이끄는 역할을 맡겼다. 안젤로는 이 일을 크게 부담스럽게 여겼지만 주변의 권유로 받아들였다. 당시에 서로 독자적으로 일어나 중구난방으로 활동하던 [[유럽]]의 전교회를 통합하고 [[바티칸]]의 지휘를 받는 조직으로 만드는 일을 하였다. 1920년대 초, [[베니토 무솔리니]]가 [[이탈리아]]에서 집권하던 시기에 안젤로는 여러 번 무솔리니를 비판하는 언행을 하곤 했다. 그 외에도 '[[가톨릭]] 신자가 비가톨릭 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용함이 좋겠다.'[* 자세한 것은 [[혼인성사]] 참조.]는, 당시 가톨릭으로서는 놀랍도록 좌파적인 주장을 하여 충격을 주었다. 이 시기에 바티칸 일각에서는 안젤로에게 '근대주의자(modernist)'[* 여기서 말하는 근대주의(modernism)는 20세기에 [[그리스도교]] 세계에 분 조류를 말한다.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성으로 재분석하고 해체하여 다시 쌓아 올리자는 것이다. 자유주의 신학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. [[비오 10세]]는 근대주의를 이단의 온상으로 강경하게 단죄하고 1910년에는 모든 성직자들이 反근대주의를 맹세하도록 했다. 비오 10세 교황의 이 조치는 1967년에 폐지되었다.] 혐의가 있다는 딱지를 붙였다. 쉽게 말하자면 '저놈 이단자 아닐까요?'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